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친구들

from 칼로리바란스/2008 2008/05/13 23:43

 대부분의 시간은 망각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. 기억은 내 의지에 따라 윤색되거나 완전히 바뀌었다. 스물일곱, 새벽을 뜬눈으로 지새우는 날이 많았다. 있는 힘을 다해 취해버린 젊은 날을 회상하기도 했고 얼굴이 지워진 옛 친구들의 일상을 멋대로 상상했다. 어린 친구는 기타를 배우러 다닌다고 했다. 나도 고등학교 시절 기타를 들어본 경험이 있다. 제대로 배우지는 않았다. 몇 번 들어봤을 뿐이었다. 지미 핸드릭스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그 대상은 중요하지 않았다. 교과서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배워보고 싶은 나이였다. 지금의 나는 다르다. 새로운 일들은 경계의 대상이다. 그것들은 거의 귀찮을 따름이고 때때로 나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들이다. 당장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별 희망없는 청춘들은 자신들이 그 시절 꿈 많고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도시의 미로를 방황할 뿐이다. 학창시절, 우리는 전화통을 붙들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. 주말이면 보다 심각한 대화를 나누었다. 그러나,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을 그 무수한 낱말들을 우리는 그곳에 온전히 남겨두고 이미 멀리 와버렸다. 아마, 너네 반 아무개가 우리 반 아무개를 좋아하나 봐. 같은 바보 같은 입김들이 전선을 타고 오고 갔을 뿐이었다. 무슨 말이냐는 건 아무래도 좋았다. 숨 막히던 이불 속에서, 생생하게 들려오던 '당신의 숨소리'만 들어도 저절로 가슴이 뛰던 시절이었다. 그런 그녀가 벌써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고 한다. 낯선 남자와 결혼을 했으니 나는 결혼한 것도 모르고 살았다. 새로운 남자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시작하는 여자에게 과거의 남자는 지워야할 낙서에 불과했다. 나는 그 소식을 듣고는 맥주를 한 잔 들이켰을 뿐이었다. 소식을 잊고 살았던 많은 친구들이 대학에서 직장으로 자리를 옮겼다. 그들은 아침이면 넥타이를 매고 업무회의 테이블에서 획기적인 기획안으로 상사에게 신임을 구한다. 일을 마치고 몇 번은 맥줏집에 들러 업계의 동정을 살핀다. 고단한 일상이다. 늦은 밤 침대에 몸을 묻으면 어느새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. 시간은 거침이 없다. 상사의 취향을 고려하고 영민한 신입사원들의 분발을 견제해야 한다. 그들은 이미 우리의 과거를 감동적으로 기억할만한 시간을 갖기가 좀처럼 어렵다. 몇 해가 지나면 누군가의 결혼 소식이 들려올 것이다. 예식장은 잊고 살았던 친구들과 재회하는 만남의 광장이 될 것이다. 직함과 연락처가 박힌 명함을 주고받는 일에 이미 그들은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. 애써 자신의 입지를 확인하며 스테이크 한 점을 바싹 마른 목구멍으로 밀어넣는 일들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. 그럴 즈음에 나는 또다시 그 낯선 남자를 닮은 그녀의 아기를 떠올릴지 모른다. 그리고 나는 또 쉽게 들켜버릴 것이다.